버럭 성 을 내던 라온을 떠올리며 영은 흐리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병연에게 물었다.
“그런데 혹시 말복이가 뉘인지 아느냐?”
“ ...... 큭.”
병연에게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야? 왜 웃는 것이냐? 대체 말복이가 누군 데?”
“저 녀석 이웃집에서 기르던 개 이름이라고 하더군”
“무어라?”
영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감히 왕세자인 나를 한낱 개와 비교해?
만약 다른 이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면, 당장에 치도곤을 내렸을터. 감히 왕세자를 농락한 죄를 물어 참수한다고 해도 이상 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작 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저 맹랑한 녀석의 하는 짓이 참 으로 기가 막혔지만, 밉지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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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을 배웅한 병연이 자선당 안으로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한 시진 후 였다. 방 안에 들어서자 책상에 얼굴을 묻고 있는 라온의 뒷모습이 그의 시야에 맺혔다.
“홍 라온.”
병연은 무릎을 굽힌 채 라온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밖에서 라온 과 영의 대화를 모두 들었던 터라, 라온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예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이 척박한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발버둥 치는 녀석이 오늘따라 더 안쓰럽게 느껴졌다.
“이봐, 홍 라온.”
병연은 라온의 어깨를 조심스레 흔들었다.
“단희야, 조금만 기다려 ......., 어머니, 어떻게든 보러 갈 테니, 조금 만 ..... 기다리세요. "
라온이 낮게 잠꼬대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병연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뭐야? 장원하겠다며 큰소리치더니, 그새 잠든 거야?”
피곤하기도 할 터였다. 이 작은 몸으로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종종걸음 쳤으니. 어디 그뿐일까? 요즘은 잠자기 직전까지 책과 씨름하고 있었다. 병연은 요 며칠 라온이 공부 하던 책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돌연 세필 붓을 집어 들었다. 예전엔 붓이 제 팔과 같았는데, 이젠 전혀 생소한 것처럼 어색하기만 했다. 병연은 고개를 돌려 잠든 라온의 얼굴을 보았다. 무슨 꿈을 꾸는지, 라온이 해사하게 웃었다. 아마 꿈속에서 그리운 가족들과 재회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병연은 풀썩 웃고 말았다.
이 작은 녀석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이리도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이 까짓 것이 뭐라고 이리 연연해하는 것일까.
이윽고, 결심을 굳힌 병연이 들고 있던 세필 붓을 거침없이 놀리기 시 작했다. 라온이 작은 머리를 굴리며 그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애쓰던 공자님의 말씀이 단숨에 이해하기 쉽게 풀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