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은주 입니다. 1996년 5월 20일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빠 엄마는 첫째로 낳은 저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졌습니다.특히 자고 일어나서 울지 않고 잘 웃었다고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저의 아기 시절을 기억했습니다. 저는 첫 번째 생일을 맞아 유아 세례를 받았습니다. 제 본명은 루치아(Lucia)입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의 뜻을 얘기해줍니다. 나는 2살 3살 때에도 미사에서 조용할 줄 알고 성가를 따라 부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미사를 마치고 신부님이 주시는 사탕을 주시면서 웃어 주시는 신부님을 만나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일곱살에 성당에 찾아오신 가톨릭대학교 총장님이 “이다음에 카톨릭대학교 가고 싶은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라고 했을 때 제일 먼저 손을 들고 가톨릭 대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는 아빠가 근무하는 가톨릭 대학교 의과대학교 캠퍼스와 병원에 가면 놀이터처럼 즐거웠습니다. 일곱살 때 병원에 이비인후과 가던 날 우연히 만난 할아버지 신부님이 나를 보고 이쁘다고 쓰다듬어 주셨는데 나중에 보니 김수환 추기경이셨습니다. 지금도 그분의 인자하신 얼굴이 떠오르고 감동적인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초등학교기
나는 8살에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담임 선생님이 목소리 큰 나에게 반 친구들을 조용히 시키게 하고 반의 규율을 잡도록 했습니다. 8살은 특별하게 기억이 납니다. 2003년 3월 20일 나의 여동생이 태어났습니다. 나의 여동생은 정말 작고 귀여운 아가였습니다. 난 동생을 만나러 학교에서 달려와 목욕을 하고 병원에 가서 아가동생을 만났습니다. 정말 귀여운 아가는 자고 있었습니다. 나보다 7살 어린 나의 여동생은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내 책가방을 뒤졌지만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나의 초등학교 생활에서 내 동생은 늘 같이 있었으며, 엄마가 신문사에서 늦게 돌아오면 같이 놀아주고 돌봐줘서 동생은 엄마보다 나를 더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동생은 내가 바르게 생활하면서 책임감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해 준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나는 학교에서도 인가가 많았습니다. 학교 친구들은 내가 웃으면서 재미있는 얘기를 해 주면 너무 좋아했습니다. 나는 3학년때 첫영성체를 받고 성가대를 하면서 주일학교에 매주 나갔습니다. 늘 성가대를 하면 기분이 좋았습니다. 성가대의 경험으로 4학년때엔 학교 합창단이 되어서 지역대회에도 나갔습니다. 선생님은 내가 작지만 귀엽다고 제일 앞에 중앙에 세워주셨고 교감선생님은 내가 노래 하는 태도가 너무 예쁘다고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나는 늘 즐겁지만 아픈 동물을 보면 가슴이 아파서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습니다. 길에 아픈 고양이가 앞도 못보고 비틀거리는 모습에 다가가려고 하는데 아저씨들이 막았습니다. 집에 오면서 고양이 걱정에 계속 울었습니다. 엄마가 깜짝 놀라서 물었을 때 가슴이 너무 아파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때 동물들도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사람이 지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맞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때에 TV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를 보면서 너무 멋지다고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제일 멋지게 본 아나운서가 기자 시험을 치고 기자가 되어서 단독 뉴스 진행을 하는 모습에 반했습니다. 한국 MBC 김주하 기자는 한국의 뉴스 진행을 정말 잘 하고 중저음의 목소리로 신뢰가 가는 뉴스를 진행하던 그 모습을 닮고 싶었습니다. 엄마가 근무하는 신문사에서 음악회를 할 때 가서 엄마네 기자들이나 엄마가 하는 일이 정말 매력적이었기에 마음에 나의 꿈을 언론계에서 일하고 싶다는 작은 나무를 심었습니다.
중학교 기
엄마가 졸업한 중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학교에 대해서 엄마와 서로 얘기할게 많아서 친구처럼 가까워졌습니다. 친구의 마음으로 신문사 일로 바쁜 엄마를 대신해서 여동생을 돌보고 간식을 해 주면서 음식을 잘 하는 저의 재능도 발견했습니다. 가끔은 여동생을 놔두고 친구들과의 시간을 보냈지만 그래도 늘 여동생이 생각이 나서 집으로 달려오는 오는게 우선이었습니다. 나는 학교 생활에서의 재미를 기자로 3년 내내 활동하면서 느꼈습니다. 기자로써 학교 축제 취재 학교 행사 때 취재를 하는 것은 생동감이 넘치고 가슴이 뛰어 살아있는 느낌이 확실했습니다. 사춘기 시절이어서 반항을 하고 싶은 생각도 있을 때 기자증을 보면서 학교의 규율과 선생님들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는 바른 생각의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판단을 할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 나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많이 얘기하기 보다는 다양한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학과 공부보다는 한국의 역사와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는 것을 엄마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스스로 선택하도록 기다려 주었기에 저는 제 자신에 대한 사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기
고등학교 1학년 다시 엄마와 나는 동문이 되었습니다. 체육 선생님이 내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 엄마에게 전화하라고 해라.” 하시기에 놀랐습니다. 엄마가 전화를 하시니 “ 많이 닮아서 바로 딸인지 알아보겠더라.” 시며 엄마의 선생님은 엄마를 기억했습니다. 그 이후 친구들이 선생님 지도를 잘 따르지 않으면 선생님은 나에게 지도를 부탁했다. 친구들을 지도하면서 알게 된 것은 나는 예절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다. 친구들이 선생님께 인사를 잘 안하거나 수업 시간에 친구들이 떠들고 선생님 말씀에 불손하면 화가 난다. 난 내 안의 작은 정의감과 냉정한 이성을 알게 되었다. 친구들을 뒤에서 얘기 하는 것을 싫어하며, 친구들이 나에게 털어놓은 이야기의 비밀 유지를 중요하게 여겨서 친구가 많았다.
친구들은 내가 말을 하면 잘 따라주고 이해하였다. 그런 리더십을 교사단체들은 칭찬하여 표창장을 수여 해줬다
장은주 나는 ….
나는 가톨릭 신자로서 예수님의 기적을 믿으며,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려는 사람과 사람간의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것이며, 내 안에 악이 싹 트지 않도록 하느님 안에 생활을 우선으로 하려고 미사에 참례한다.
우리가 사는 지금은 인터넷의 세상이다. 거기엔 많은 자유와 많은 의견들이 올라온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두 진실은 아니다. 사람은 주장을 하면서 자기자신의 옳고 그름을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그에 동조하는 극우와 극좌의 그룹들이 있다. 지금은 세상을 단면으로 보지 말고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는 냉정함이 필요하다.
나의 고교 시절 친구들은 어려서 순수하다는 세상의 정의와는 차이가 있게 꼭 순수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어른들은 순수하지 않지만 순간의 순수가 보일 때가 있다. 상황이 순수할 수도 순수하지 않을 수도 있게 하는 현상을 나는 봤다. 이런 현상은 중국의 태초에 “인간의 성품이 본래부터 악(惡)한 것이라고 보는 순자(荀子)의 학설과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과 대립되는 이론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선과 악의 구별과 삶의 지표에 대한 과제를 주었다. 중국은 고대 유교의 본원이며 공자의 나라이다. 공자 이외에도 맹자, 순자, 장자, 노자등의 많은 철학적 학자를 배출했다. 사람들은 현대의 물결에 많은 것을 잃지만 나는 모두가 빠른 인터넷 세상에 편승하려는 초조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자의 소양을 제대로 기르기 위한 중국의 사상과 냉정하고 탄력적인 사고의 매력을 배울 작은 소양을 바탕으로 그릇이 큰 인재가 되기 위한 긍정적인 한국의 예비 언론인 장은주를 꿈 꾼다.
나에 대한 소개 핵심
대한민국의 보통의 고등학교 졸업자 장은주는 예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환영하지만 이기적인 자유는 싫어한다.
순자와 맹자의 성악설과 성선설에 대한 탐구에 대한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의 역사와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한국과 대만의 문화와 역사를 상호 이해하도록 대만의 문화와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학습을 하고 싶은 결심을 가지고 있다.
기자는 말로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전달하는 메신저라고 생각하고 열린 보도를 위한 교육에 임하고자 한다.
기자의 취재 정신을 배우는 마음으로 학교 생활을 할 다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