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순] 우리 사이의 거리
“너 요즘 왜 이렇게 많이 먹냐.”애정결핍 뭐 그런 거냐. 게임 화면에 집중하던 이석민이 툭 물어왔다. 귀신이네. 나는 입에 물고 있던 감자칩을 채 씹지도 않은 채 조이스틱을 들지 않은 손으로 초콜릿 포장을 벗겼다. 미친놈아. 그만 먹어. 대답 없는 내게 이석민의 게임캐릭터가 내 캐릭터에 스킬을 날렸다. 덕분에 HP바가 바닥에 가까웠던 내 캐릭터는 게임오버가 되었고, 나는 미련 없이 조이스틱을 던지고 이번에는 새 콜라 캔을 땄다. “연애도 하는 놈이 무슨 애정결핍?”“그러게 말이다.”“…순영이 형이랑 안 좋아?”“안 좋기는. 너무 좋아서 탈인데.”물론 나 혼자만. 덧붙인 내 말에 이석민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그새 화면에 게임오버가 떠 있었고 조이스틱 두 개가 나란히 저 멀리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야 진짜 무슨 일 있어? 나는 대답 대신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한숨을 쉬었다. “노코멘트다. 이 스파이 자식아.”“뭘 또 스파이야.”“나 아직 ‘올리브영 그거’ 안 잊었다.”“야 그건 내가 미안하다고 했…지만 미안하다, 그래.”내 눈치를 보던 이석민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게임기와 조이스틱, 과자봉지를 주섬주섬 치우기 시작했다. 아, 갑자기 또 생각하니 빡치네. ‘올리브영 그거’란 원우 형이 방울토마토를 사러 간다 하기에 따라나섰던 그 곳에서 호기심에 샀던 콘돔의 존재를 이석민이 권순영에게 일러바친 일…을 말한다. 권순영은 그 날 이후로 일주일동안 나와 눈이 마주치면 어색하게 웃고, 손을 잡으면 눈에 띄게 당황하고, 내가 안무를 틀려도 지적하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틀린 안무를 보고도 그냥 넘어가는 권순영은 좀 충격이었다. 그 뿐이라면 내가 더 말도 안했다. 심지어는 (반쯤은 과장이지만) 무려 권순영이 그렇게 좋아하는 피자를 먹다가 올리브를 씹더니 피자를 내려놓았다….아니 누가 대뜸 섹스하자고 했냐고! 설사 내가 그랬다고 쳐도! 심지어 우리 사귀는데! 갑자기 열이 뻗쳐서 허공에 발차기를 하자 옆을 지나가던 찬이가 경기를 했다. 이석민이 막내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다며 잔소리를 시작했지만 듣는 둥 마는 둥 일어나 옷을 입었다. 머리는 복잡하지만 일단 연습실에 가야겠다. 얼굴 보기 힘든 우리 권순영 보러.우리 사이의 거리w.버터사옥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연습실로 달려가 권순영을 본 것 까지는 좋았는데, 뭐라 말을 걸기도 전에 안무가 형한테 잡혀서 하드코어 트레이닝을 받아야 했다. 저한테 왜 그러세요. 구슬프게 울부짖는 나에게 안무가 형이 그랬다. 오늘 안 하면 내일 12시간 잡혀있을 줄 알어. 목숨 귀한 줄 아는 나는 입을 다물었다.아무튼 그 때부터 연습만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어제까지만 해도 날 본체만체 하던 권순영이 슬금슬금 다가와 무리가 안가는 자세를 일러주고 중간 중간 차가운 음료수를 가져와 바닥에 두고 갔다. 뭐야, 이거. 썸 탈 때도 안하던 걸 하네. 나는 땀을 뚝뚝 흘리며 거울 너머의 권순영을 힐끔힐끔 눈에 담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권순영도 거울 너머의 날 쳐다봤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나는 형 얼굴만 봐도 힘나는 것 같네. 물론 이 말은 속으로만 했다.“그러게 쉬는 날에 뭐 하러 여길 왔어.”안무가 형이 연습생들을 봐주러 연습실을 떠나자마자 벌렁 드러누웠다. 그러자 음악을 끈 권순영이 천천히 걸어와 바닥에 드러누운 나를 빼꼼 내려다봤다. 뭐야, 나 열심히 했다고 상 주는 거야? 좀 놀라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얼굴을 올려다봤는데 익숙한 무표정이었다. 나 저 표정 아는데, 지금 좀 쑥스러워 하고 있는 것 같다. 저 형은 가끔 저렇게 귀여운 얼굴을 해서 사람 마음 이상하게 하곤 했다. 아, 그리고 아까는 얼굴만 보느라 몰랐는데, 오늘 빨간 스냅백을 썼다. 형아 너 오늘 좀 과일 같은데, 하면 못 들은 척 하려나.“형, 있잖아….”“야, 김민규! 여기서 뭐하냐! 전화도 안 받고!”실없이 웃으며 입을 연 순간 연습실로 승철이 형이 들어왔다. 어, 형. 이윽고 나는 분명히 권순영 앞에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뒷덜미를 잡혀 연습실 밖 복도를 걷고 있었다. 내 몸인데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냐, 왜.“뭐야, 왜 이래!”“야, 급해. 겁나 급해.”승철이 형이 나를 질질 끌고 가더니 보컬룸에 쳐넣었다. 저번에 그 랩 가사 지금 마무리 해. 지훈이가 빨리 써오래. 10시 마감.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남기고 문이 쾅 닫혔다. 미친. 오늘 다들 날 잡았어? 나 그 가사 아직 한참 남았는데?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하, 시발. 진짜 돌겠네.**거의 3시간 동안 창문도 없는 방에 갇혀서 겨우겨우 가사를 썼다. 처음 1시간 동안에는 진짜 아무 생각이 안 나서 음원만 틀어놓고 멍하니 허공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30분 동안은 노트에 잡생각만 가득 옮겨 적었다. 물론 그 잡생각의 9할은 권순영의 이름이나 ‘너는 왜 나 안 사랑해.’ 같은, 누가 보면 쪽팔릴 것 같은 내용이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벼락치기로 가사를 썼고, 시계가 10시를 가리키기 직전에 작업실에 있는 지훈이 형에게 토스했다.웬일로 한 번에 괜찮게 썼네. 괴발개발 손글씨로 써내려간 가사를 훑어 본 지훈이 형이 말했다. 그 말이 ‘별로였으면 너는 오늘 죽었어.’ 로 들려서 식은땀이 났다. 녹음은 내일 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바로 계단을 타고 연습실로 달렸다. 음악소리가 안 나서 아무도 없나 덜컥 겁이 났는데, 중간에 있는 유리문을 통해 들여다봤더니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다행이다. 아직 있었네.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고, 문을 열고 연습실로 들어갔다. 이어폰을 낀 권순영이 의자에 가방을 올려두고 수건이고 운동화고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서 권순영의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동그랗게 뜬 눈이 날 쳐다보았다.“아, 뭐야.”“미안.”“너 왜 여기 있어? 가사 쓰러 갔다더니.”“누가 그래?”“아까 승철이 형이 그러던데 아니야?”“맞아.”“…설마 다 썼어?”그럼. 내가 누군데. 잘난 척을 했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본다. 그러더니 챙기던 가방을 마저 챙기고 어깨에 멨다. 어디 가려고. 손목을 잡았더니 잡힌 손목이랑 내 얼굴을 번갈아 보고 여상한 표정을 했다. 어디 가긴. 숙소 가지.“와. 권순영 웃긴다.”“뭐가.”“나 안 기다려 줘?”“같이 가자는 말 안 했잖아.”또 이러네. 권순영이랑 알고 지내면서 백번은 들었던 말이다. 언제 약속했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사귄다고 모든 일상을 공유해야 된다고는 생각 안 하는데, 등등. 물론 처음부터 이런 성격인 거 다 알고 시작한 거고, 이제는 서운함도 애정으로 승화할 수 있는 권순영의 완벽한 남자친구인 김민규는 ‘권순영 대처법’으로 책 한권을 써낼 수도 있는 경지에 다다랐다. 그러니까, 이럴 때는….“권순영.”“아까부터 말이 짧으시네요.”“호시씨.”“…왜요.”“대스타라서 바쁘신 건 알겠는데….”“…….”“잠깐 시간 내서 저랑 데이트 어떠세요.”숙소 가는 길에 잠깐이면 될 것 같은데. 권순영이 메고 있던 가방을 대신 들며 눈을 찡긋했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싫다고 하면 울어야지. 내 시선을 받은 권순영이 손을 뻗어 다시 가방을 가져갔다.“야, 내 가방은 내가 들어.”“헐.”“넌 빨리 정리하고 내려와. 나 1층에 있을테니까.”운동화 앞코를 바닥에 톡톡 두들긴 권순영이 몸을 돌려 유리문을 열고 나갔다. 와. 권순영 존나 멋있다. 나는 서둘러 짐을 챙겼다. 좀 멋없었지만 데이트 신청은 성공적인 것 같다.**“김민규.”“왜요, 호시씨.”“여기 온 이유가 뭐야.”나는 내 취향대로 메로나를, 권순영은 내가 골라준 밀키스를 들고 가까운 초등학교 운동장에 왔다. 왜? 별로야? 내가 메로나를 크게 베어 물며 묻자, 권순영이 한숨을 쉬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저기 봐. 팬들 따라왔어. “뭐 어때. 산책도 못하나.”“됐다, 됐어.”“아아, 권순영 무드 없네, 진짜.”“…야.”“왜.”“……이거 잘 마실게.”고개를 푹 숙이고 밀키스 뚜껑을 여는 권순영은 귀엽다. 나는 차마 귀엽다는 말을 소리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주머니에서 가져온 빨대를 건네주었는데, 권순영은 필요 없다는 듯 그대로 고개를 꺾어 마셨다. “우리 그네 탈까?”“너가 타면 그네 줄 끊어져.”“그럼 시소 타자.”대답을 듣기도 전에 시소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섰다. 내가 완전히 앉지 않고 멀뚱히 서 있으니 권순영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왜 안 앉고 그러고 있어. 그리고 날 억지로 앉히려 들길래 몸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내가 먼저 앉으면 형은 점프해서 앉아야 될 걸. 3초간 무언가 생각하던 권순영이 잔뜩 열 받은 표정으로 내 등짝을 후려쳤다. “아주 키 커서 좋으시겠네.”“어. 좋아. 되게 좋은데.”“이게 진짜…….”“남양주 사는 권모씨도 나 키 커서 좋다 그랬는데.”이번에는 내 팔뚝을 차지게 내려친 권순영이 시소 반대쪽으로 가서 앉는 걸 보고 나도 편하게 앉았다. 권순영이 먼저 앉는 바람에 그 쪽으로 치우쳤던 시소가 내가 앉자마자 빠르게 내 쪽으로 기울었다. “너도 말랐는데 왜 이렇게 가파르게 기우는 거야.”“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키도 더 크고. 근육량도 많고….”“진짜 죽을래?”미안. 하나도 안 무서운데 무서운 척을 해주었다. 이렇게 하면 대개 권순영은 그냥 넘어가 주는데 이건 ‘권순영 귀여움 사전’ 1장에 나오는 귀여움이다. 헉. 방금 건 내가 생각해도 좀 닭살 돋는다.이거 재밌다. 첨엔 투덜투덜 하더니 오랜만에 타는 시소라서 제법 신나게 발을 굴러주는 권순영이다. 연습생 때는 자주 이렇게 근처 운동장에서 놀았는데, 데뷔 하고 나서는 바빠서 잠 잘 시간도 없다 보니 정말 오랜만이었다. 달이 예쁘게 뜬 초여름 밤, 선선하게 가라앉은 공기, 풀벌레 소리, 오랜만에 활짝 웃는 권순영 얼굴… 이런 것들이 전부 익숙하고도 생소했다.발을 구르던 것을 멈추고 푹 앉아버리니 권순영의 다리가 공중에 붕 떴다. 권순영의 뒤로 대낮같이 밝은 달이 마치 조명처럼 보였다.“형.”“왜.”“형아.”“징그럽게 왜 이래.”또, 또 미운소리 한다. 나는 언제나처럼 ‘그래도 사랑하는’ 권순영을 쳐다보았다.“나는 가끔. 이 연애, 나 혼자 하는 것 같아서 우울했어.”“야….”“그냥 들어줘.”“이거, 시소처럼. 나만
[大小網] 我們之間的距離“너 요즘 왜 이렇게 많이 먹냐.”애정결핍 뭐 그런 거냐. 게임 화면에 집중하던 이석민이 툭 물어왔다. 귀신이네. 나는 입에 물고 있던 감자칩을 채 씹지도 않은 채 조이스틱을 들지 않은 손으로 초콜릿 포장을 벗겼다. 미친놈아. 그만 먹어. 대답 없는 내게 이석민의 게임캐릭터가 내 캐릭터에 스킬을 날렸다. 덕분에 HP바가 바닥에 가까웠던 내 캐릭터는 게임오버가 되었고, 나는 미련 없이 조이스틱을 던지고 이번에는 새 콜라 캔을 땄다. “연애도 하는 놈이 무슨 애정결핍?”“그러게 말이다.”“…순영이 형이랑 안 좋아?”“안 좋기는. 너무 좋아서 탈인데.”물론 나 혼자만. 덧붙인 내 말에 이석민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그새 화면에 게임오버가 떠 있었고 조이스틱 두 개가 나란히 저 멀리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야 진짜 무슨 일 있어? 나는 대답 대신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한숨을 쉬었다. “노코멘트다. 이 스파이 자식아.”“뭘 또 스파이야.”“나 아직 ‘올리브영 그거’ 안 잊었다.”“야 그건 내가 미안하다고 했…지만 미안하다, 그래.”내 눈치를 보던 이석민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게임기와 조이스틱, 과자봉지를 주섬주섬 치우기 시작했다. 아, 갑자기 또 생각하니 빡치네. ‘올리브영 그거’란 원우 형이 방울토마토를 사러 간다 하기에 따라나섰던 그 곳에서 호기심에 샀던 콘돔의 존재를 이석민이 권순영에게 일러바친 일…을 말한다. 권순영은 그 날 이후로 일주일동안 나와 눈이 마주치면 어색하게 웃고, 손을 잡으면 눈에 띄게 당황하고, 내가 안무를 틀려도 지적하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틀린 안무를 보고도 그냥 넘어가는 권순영은 좀 충격이었다. 그 뿐이라면 내가 더 말도 안했다. 심지어는 (반쯤은 과장이지만) 무려 권순영이 그렇게 좋아하는 피자를 먹다가 올리브를 씹더니 피자를 내려놓았다….아니 누가 대뜸 섹스하자고 했냐고! 설사 내가 그랬다고 쳐도! 심지어 우리 사귀는데! 갑자기 열이 뻗쳐서 허공에 발차기를 하자 옆을 지나가던 찬이가 경기를 했다. 이석민이 막내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다며 잔소리를 시작했지만 듣는 둥 마는 둥 일어나 옷을 입었다. 머리는 복잡하지만 일단 연습실에 가야겠다. 얼굴 보기 힘든 우리 권순영 보러.우리 사이의 거리w.버터사옥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연습실로 달려가 권순영을 본 것 까지는 좋았는데, 뭐라 말을 걸기도 전에 안무가 형한테 잡혀서 하드코어 트레이닝을 받아야 했다. 저한테 왜 그러세요. 구슬프게 울부짖는 나에게 안무가 형이 그랬다. 오늘 안 하면 내일 12시간 잡혀있을 줄 알어. 목숨 귀한 줄 아는 나는 입을 다물었다.아무튼 그 때부터 연습만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어제까지만 해도 날 본체만체 하던 권순영이 슬금슬금 다가와 무리가 안가는 자세를 일러주고 중간 중간 차가운 음료수를 가져와 바닥에 두고 갔다. 뭐야, 이거. 썸 탈 때도 안하던 걸 하네. 나는 땀을 뚝뚝 흘리며 거울 너머의 권순영을 힐끔힐끔 눈에 담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권순영도 거울 너머의 날 쳐다봤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나는 형 얼굴만 봐도 힘나는 것 같네. 물론 이 말은 속으로만 했다.“그러게 쉬는 날에 뭐 하러 여길 왔어.”안무가 형이 연습생들을 봐주러 연습실을 떠나자마자 벌렁 드러누웠다. 그러자 음악을 끈 권순영이 천천히 걸어와 바닥에 드러누운 나를 빼꼼 내려다봤다. 뭐야, 나 열심히 했다고 상 주는 거야? 좀 놀라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얼굴을 올려다봤는데 익숙한 무표정이었다. 나 저 표정 아는데, 지금 좀 쑥스러워 하고 있는 것 같다. 저 형은 가끔 저렇게 귀여운 얼굴을 해서 사람 마음 이상하게 하곤 했다. 아, 그리고 아까는 얼굴만 보느라 몰랐는데, 오늘 빨간 스냅백을 썼다. 형아 너 오늘 좀 과일 같은데, 하면 못 들은 척 하려나.“형, 있잖아….”“야, 김민규! 여기서 뭐하냐! 전화도 안 받고!”실없이 웃으며 입을 연 순간 연습실로 승철이 형이 들어왔다. 어, 형. 이윽고 나는 분명히 권순영 앞에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뒷덜미를 잡혀 연습실 밖 복도를 걷고 있었다. 내 몸인데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냐, 왜.“뭐야, 왜 이래!”“야, 급해. 겁나 급해.”승철이 형이 나를 질질 끌고 가더니 보컬룸에 쳐넣었다. 저번에 그 랩 가사 지금 마무리 해. 지훈이가 빨리 써오래. 10시 마감.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남기고 문이 쾅 닫혔다. 미친. 오늘 다들 날 잡았어? 나 그 가사 아직 한참 남았는데?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하, 시발. 진짜 돌겠네.**거의 3시간 동안 창문도 없는 방에 갇혀서 겨우겨우 가사를 썼다. 처음 1시간 동안에는 진짜 아무 생각이 안 나서 음원만 틀어놓고 멍하니 허공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30분 동안은 노트에 잡생각만 가득 옮겨 적었다. 물론 그 잡생각의 9할은 권순영의 이름이나 ‘너는 왜 나 안 사랑해.’ 같은, 누가 보면 쪽팔릴 것 같은 내용이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벼락치기로 가사를 썼고, 시계가 10시를 가리키기 직전에 작업실에 있는 지훈이 형에게 토스했다.웬일로 한 번에 괜찮게 썼네. 괴발개발 손글씨로 써내려간 가사를 훑어 본 지훈이 형이 말했다. 그 말이 ‘별로였으면 너는 오늘 죽었어.’ 로 들려서 식은땀이 났다. 녹음은 내일 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바로 계단을 타고 연습실로 달렸다. 음악소리가 안 나서 아무도 없나 덜컥 겁이 났는데, 중간에 있는 유리문을 통해 들여다봤더니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다행이다. 아직 있었네.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고, 문을 열고 연습실로 들어갔다. 이어폰을 낀 권순영이 의자에 가방을 올려두고 수건이고 운동화고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서 권순영의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동그랗게 뜬 눈이 날 쳐다보았다.“아, 뭐야.”“미안.”“너 왜 여기 있어? 가사 쓰러 갔다더니.”“누가 그래?”“아까 승철이 형이 그러던데 아니야?”“맞아.”“…설마 다 썼어?”그럼. 내가 누군데. 잘난 척을 했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본다. 그러더니 챙기던 가방을 마저 챙기고 어깨에 멨다. 어디 가려고. 손목을 잡았더니 잡힌 손목이랑 내 얼굴을 번갈아 보고 여상한 표정을 했다. 어디 가긴. 숙소 가지.“와. 권순영 웃긴다.”“뭐가.”“나 안 기다려 줘?”“같이 가자는 말 안 했잖아.”또 이러네. 권순영이랑 알고 지내면서 백번은 들었던 말이다. 언제 약속했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사귄다고 모든 일상을 공유해야 된다고는 생각 안 하는데, 등등. 물론 처음부터 이런 성격인 거 다 알고 시작한 거고, 이제는 서운함도 애정으로 승화할 수 있는 권순영의 완벽한 남자친구인 김민규는 ‘권순영 대처법’으로 책 한권을 써낼 수도 있는 경지에 다다랐다. 그러니까, 이럴 때는….“권순영.”“아까부터 말이 짧으시네요.”“호시씨.”“…왜요.”“대스타라서 바쁘신 건 알겠는데….”“…….”“잠깐 시간 내서 저랑 데이트 어떠세요.”숙소 가는 길에 잠깐이면 될 것 같은데. 권순영이 메고 있던 가방을 대신 들며 눈을 찡긋했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싫다고 하면 울어야지. 내 시선을 받은 권순영이 손을 뻗어 다시 가방을 가져갔다.“야, 내 가방은 내가 들어.”“헐.”“넌 빨리 정리하고 내려와. 나 1층에 있을테니까.”운동화 앞코를 바닥에 톡톡 두들긴 권순영이 몸을 돌려 유리문을 열고 나갔다. 와. 권순영 존나 멋있다. 나는 서둘러 짐을 챙겼다. 좀 멋없었지만 데이트 신청은 성공적인 것 같다.**“김민규.”“왜요, 호시씨.”“여기 온 이유가 뭐야.”나는 내 취향대로 메로나를, 권순영은 내가 골라준 밀키스를 들고 가까운 초등학교 운동장에 왔다. 왜? 별로야? 내가 메로나를 크게 베어 물며 묻자, 권순영이 한숨을 쉬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저기 봐. 팬들 따라왔어. “뭐 어때. 산책도 못하나.”“됐다, 됐어.”“아아, 권순영 무드 없네, 진짜.”“…야.”“왜.”“……이거 잘 마실게.”고개를 푹 숙이고 밀키스 뚜껑을 여는 권순영은 귀엽다. 나는 차마 귀엽다는 말을 소리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주머니에서 가져온 빨대를 건네주었는데, 권순영은 필요 없다는 듯 그대로 고개를 꺾어 마셨다. “우리 그네 탈까?”“너가 타면 그네 줄 끊어져.”“그럼 시소 타자.”대답을 듣기도 전에 시소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섰다. 내가 완전히 앉지 않고 멀뚱히 서 있으니 권순영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왜 안 앉고 그러고 있어. 그리고 날 억지로 앉히려 들길래 몸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내가 먼저 앉으면 형은 점프해서 앉아야 될 걸. 3초간 무언가 생각하던 권순영이 잔뜩 열 받은 표정으로 내 등짝을 후려쳤다. “아주 키 커서 좋으시겠네.”“어. 좋아. 되게 좋은데.”“이게 진짜…….”“남양주 사는 권모씨도 나 키 커서 좋다 그랬는데.”이번에는 내 팔뚝을 차지게 내려친 권순영이 시소 반대쪽으로 가서 앉는 걸 보고 나도 편하게 앉았다. 권순영이 먼저 앉는 바람에 그 쪽으로 치우쳤던 시소가 내가 앉자마자 빠르게 내 쪽으로 기울었다. “너도 말랐는데 왜 이렇게 가파르게 기우는 거야.”“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키도 더 크고. 근육량도 많고….”“진짜 죽을래?”미안. 하나도 안 무서운데 무서운 척을 해주었다. 이렇게 하면 대개 권순영은 그냥 넘어가 주는데 이건 ‘권순영 귀여움 사전’ 1장에 나오는 귀여움이다. 헉. 방금 건 내가 생각해도 좀 닭살 돋는다.이거 재밌다. 첨엔 투덜투덜 하더니 오랜만에 타는 시소라서 제법 신나게 발을 굴러주는 권순영이다. 연습생 때는 자주 이렇게 근처 운동장에서 놀았는데, 데뷔 하고 나서는 바빠서 잠 잘 시간도 없다 보니 정말 오랜만이었다. 달이 예쁘게 뜬 초여름 밤, 선선하게 가라앉은 공기, 풀벌레 소리, 오랜만에 활짝 웃는 권순영 얼굴… 이런 것들이 전부 익숙하고도 생소했다.발을 구르던 것을 멈추고 푹 앉아버리니 권순영의 다리가 공중에 붕 떴다. 권순영의 뒤로 대낮같이 밝은 달이 마치 조명처럼 보였다.“형.”“왜.”“형아.”“징그럽게 왜 이래.”또, 또 미운소리 한다. 나는 언제나처럼 ‘그래도 사랑하는’ 권순영을 쳐다보았다.“나는 가끔. 이 연애, 나 혼자 하는 것 같아서 우울했어.”“야….”“그냥 들어줘.”“이거, 시소처럼. 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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