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 라온의 선물.
자선당의 우거진 풀숲으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부는 대로 몸을 뉘이는 잡초 위로 검은 어둠이 내려앉는가 싶더니, 이내 저 멀 리 산등성이로 물 오른 상현달이 떠올랐다.
교교한 달빛이 풀숲을 어루만지는 자선당의 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고요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몇 명의 궁녀가 빠져 죽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연못 위로 하얀 달이 얼굴을 비췄다. 눈송이처럼 하얀 달빛 위로 바람이 불어와 찰랑거라는 파문을 일으켰다.
절로 감탄사를 자아낼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누각 위에서 흘러나왔다. “후윽⋯⋯흑흑⋯⋯흐윽⋯⋯.”
울음소리였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울음소리가 고요한 자선당을 울려 퍼겼다.
“후극⋯⋯흑흑⋯⋯흑훅⋯⋯.”
너무도 처연한 울음에 바람마저도 잠잠해 질 즈음.
누각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들어섰다. 뚜벅 거리며 걷는 발자국 소리는 곧장 울음소리 를 향해 나아갔다.
잠시 후.
“어딜 갔는가 했더니, 예 처박혀 있었던 것이냐?”
차가운 달빛을 닮은 서늘한 목소리의 주인 은 다름 아닌 화초서생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라온은 물기 가득한 얼굴을 돌려 영을 올려다보았다.
눈물, 콧물 범벅인 라온의 모습에 영이 눈 가를 찡그렸다.
“무슨 일인데, 사내놈이 이리 징징 대는 것이냐?”
영의 지정구에 라온은 서둘러 소맷자락으 로 얼굴을 쓱쓱 닦아냈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울긴 누가 울었다고 그럽니까?”
“얼굴에 있는 눈물자국이나 제대로 닦아 내고 우겨 대거라.”
영이 비단 손수건을 던지며 한마디 했다. 그렇게 티가 났나. 그런 데⋯⋯.
라온은 영이 준 비단손수건을 한참이나 내 려다보았다.
“뭐하고 있는 것이냐? 얼른 닦지 않고서.” “이거⋯⋯.”
“왜?”
“꽤 귀한 비단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하여?”
“눈물 닦기에는 너무 과합니다.”
이런 비단으로 손수건을 만들려면 대체 얼 마나 돈이 있어야 하는 걸까? 머릿속으로 셈 을 하던 라온은 손수건을 곱게 접어 다시 영 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다 영을 돌아보며 눈을 깜빡했다.
“이제 알겠습니다.”
“뭘 알겠다는 거냐?”
“그 손수건, 보통 물건이 아닌 것 같습니 다.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이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손수건 한쪽에 수놓아진 문양을 눈치 챈 모양이로구나.
그런데 정작 라온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엉뚱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혹시 돈 많은 양반 댁 서얼?”
영이 라온의 이마를 가볍게 콩 때렸다.
“대체 이 작은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 것 이냐?”
“이번에도 틀렸습니까?”
“그래. 그보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한 것이 냐?”
“귀한 손수건을 아무렇게나 쓰시니, 분명 돈은 많으신 것 같고. 그럼에도 이리 유유자 적하시니, 뭔가를 책임질 필요가 없는 홀가 분한 인생일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돈 많은 양반 댁의 서얼이다?”
“가문의 적자라면 공부를 하건 일을 하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부지런을 떨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화초서생께서는 단 한 번도 그런 분주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셔서⋯⋯.”
그렇게 보였던가?